[전문기자 칼럼] '레제노키앙'을 위하여

입력 2017-12-06 18:17   수정 2018-03-19 12:09

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 nhk@hankyung.com


콩코르드광장은 파리 중심지다. 샹젤리제거리를 사이에 두고 개선문과 반대쪽에 자리잡고 있다. 밤에는 형형색색의 대관람차가 돌아간다. 지극히 평화로운 곳이지만 프랑스 대혁명 당시엔 피비린내 나는 곳이었다. 루이 16세와 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곳에서 단두대 이슬로 사라졌다. 혁명군 지도자였던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를 포함한 1300명도 마찬가지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생전에 이 지역에 있는 보석업체에서 화려한 보석을 맞춰 가곤 했다. 일반인에겐 생소한 ‘멜르리오 디멜르’라는 보석점이다. 세계적인 부호와 유럽 왕족은 이곳을 종종 찾는다. 명품 중의 명품이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5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녔다. 1515년 문을 열었다. 이곳에서 치열한 종교전쟁, 프랑스 대혁명,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 파리코뮌은 물론 1·2차 세계대전을 지켜봤다.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때로는 상황이 급박해 경영자들이 스페인으로 일시 피신하기도 했지만 이내 돌아왔다. 기업 역사 500년을 지켜내기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창의성이 장수기업 기본 조건

기자와 두 번 만난 이 회사의 올리비에 멜르리오 사장은 “500년 동안 똑같은 제품은 없었다”며 “장수 비결은 매출이나 이익보다 얼마나 차별화한 제품을 제작하느냐에 관심을 둔 덕분”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혁신’과 ‘창의’다.

그 덕분에 마리 앙투아네트뿐 아니라 나폴레옹 1세 부인 조세핀, 나폴레옹 3세 부인 외제니 드 몽티조도 단골로 붙잡을 수 있었다. 그 역사는 지하 수장고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선형의 좁은 계단을 거쳐 지하로 내려가면 육중한 철문이 있고 이를 통과하면 서가에 수백 권의 장부책이 나온다. 그곳에 연도와 보석 디자인, 고객 이름이 펜글씨로 적혀 있다.

이 회사는 ‘레제노키앙협회(Les Henokiens)’ 회원이다. 레제노키앙은 ‘에녹 마을에 사는 사람들’ 혹은 ‘에녹과 같은 사람들’이란 뜻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에녹은 장수한 사람이다. 1981년 파리에 설립된 장수기업 국제단체인 레제노키앙협회는 ‘200년 이상 된 가족기업’만 가입할 수 있다. 더불어 가족이 회사 오너 혹은 대주주여야 하고 건전경영을 유지해야 한다. 회원사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9개국 40여 개 기업이다. 전통 산업인 와인 제조, 보석 세공 등의 기업이 대다수다.

기업을 존중하는 문화 필요

한국은 아직 이 협회 가입 기업이 없다. 연륜이 짧기 때문이다. 각국의 200년 이상된 장수기업은 일본에 3146개를 비롯 독일 837개, 네덜란드 222개, 프랑스 196개, 영국 186개가 있다. 한국은 121년 역사의 두산, 120년 역사의 동화약품이 있을 뿐이다. 백제인 류중광이 세운 오사카의 곤고구미는 1400년이 넘었지만 정작 이 땅엔 200년 이상된 기업이 없다.

한국에서도 장수기업이 나와야 한다. 명문 장수기업의 특징은 창업자의 창업정신과 핵심가치 계승, 가족화합 등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게 멜르리오 디멜르 같은 창의성이다.

더욱 중요한 건 기업을 존중하는 문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요즘 기업 현장에선 세대교체가 활발하다. 하지만 가업승계에 대한 정치권과 사회의 인식은 ‘제2의 창업’보다는 ‘부의 대물림’이라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장수기업 탄생은 요원할 것으로 보인다. 장수기업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문화가 성숙해지지 않으면 오랜 세월이 지나도 레제노키앙은 남의 나라 얘기일 뿐이다.

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 n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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